제 2장 충만하게 채우는 영성 영성은 비우는 데서 시작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성의 다음 단계는 채우는 것이다. 비움은 채움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버리는 것은 얻음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떠나는 것은 새로운 목적지가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동양의 명상은 비우는 것을 강조한다. 텅 빈 것을 최고로 생각한다. 그래서 ‘텅 빈 충만’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자기를 잊어버리는 무아지경을 깨달음의 깊은 경지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성은 달랐다. 주님은 비우신 후에 그 그릇을 충만으로 가득 채우셨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증거한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그 충만한 데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충만케 하셨다.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을 충만케 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다.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사람을 섬기는 사역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된다. 주님의 충만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 온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주님은 위에 계신 아버지가 내려 주시는 진리와 은혜를 받아서 그것을 제자들에게 흘러 보내는 일을 하셨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똑같은 일을 했다. 예수님께 받은 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 보내는 일을 했다. 바로, 제자삼는 사역이다. 우리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주는 사역이 아니다. 사역의 출발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요한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고 기록한다. 그 받은 것을 흘러 보내는 것이 사역이다. 우리는 사역의 창조자가 아니라 전달자인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의 통로인 것이다. 받기도 전에 주려는 사람이 많다. 채워지기도 전에 나누는 사람이 많다. 많은 사역자들의 문제는 채우기 전에 다 고갈시켜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재생산되고, 재충전될 여지도 없이 모조리 쏟아 내고 만다. 소양강 댐을 건설했을 때 3년 동안은 물을 내려보내지 않고 채우기만 했다고 한다. 충만히 차기까지 기다린 것이다. 영성은 바로 이 기다림에서 무르익는다. 사역자들은 갱쟁하듯이 주기를 소원한다. 무엇인가를 속히 성취하기를 원한다. 댐에 물이 차기도 전에 내려보내면 쉽게 고갈된다는 것을 모르는 탓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주기 전에 많이 받는 자이다. 많이 받는 만큼 많이 줄 수 있다. 성경은 ‘충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은혜 충만, 진리 충만, 성령 충만, 지혜 충만, 그리고 믿음 충만이란 표현이 사도행전에 보면 자주 등장한다. 충만은 가득 찬 상태이다. 이 상태를 ‘만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참된 만족은 충만을 경험할 때이다. 영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깊은 충만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충만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을 나누는 것은 충만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영성을 추구하는 자의 사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