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청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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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어느 탈북자의 편지...2024-10-15 07:30
작성자 Level 10

글/ 방성운(탈북자)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농포동에 있는 <농포집결소>는 함경북도 안전부 산하 최
고 예심기관으로서, 경제범과 중국으로 탈출하였다가 잡혀서 들어오는 월경자들에게
혹독한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심문과 판결을 하는 곳입니다.
어릴 때부터 공포 속에서만 들어오던 <농포집결소>는 정말 나의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던져준 한 많은 곳입니다.
이 곳의 심문조사는 취침시간에 하며, 자기의 결함을 한가지라도 고백해야만 그때서
야 잠을 재웁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잠을 빨리 자기 위해 하지 않은 짓도 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기
차까지 도둑질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잠자
는 시간을 잃을 때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내가 이곳에 들어가게 된 것은 중국에 월경하였다는 "죄"였습니다.
나는 1996년 7월 3일 함경북도 무산군 칠성리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의 길림성 화룡
시 덕화진 길지촌에 갔다가 7월 10일 경 덕화진 남평 파출소 변방대원들에게 잡혔습
니다.
다음날 그들은 나를 화룡시 변방대대 감방으로 호송하였습니다.
변방대대 감방에는 이미 나와 같은 탈북자 7명이 잡혀 들어와 있었습니다. 한때 중국
월경자들을 북송할 때엔 코나, 손바닥에 쇠꼬챙이를 꿰여서 데려갔다는 말을 많이 들
었기 때문에 모두 겁을 먹고 공포 속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를 포함한 탈북자 8명은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며 그 어떤 행운이라도,
혹시 중국공안에서 좋은 마음으로 그냥 내보내지 않을까 하는 허황된 생각도 해보았
습니다. 불 보듯 뻔한 사실은 북송 후 우리들에게 닥쳐올 처벌들에 대한 것이며 이런
생각으로 한숨들만 지었습니다.

나는 그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항상 옷 빈침(옷핀)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옷 빈침은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종이로 살짝 감아서 삼키면 창자로 내려가다가 아무
데나 걸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을 수 있어 그때에 도망치려고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빈침을 몰래 삼켰습니다. 하지만 삼킨 빈
침은 창자에 걸리기는커녕 전혀 소식이 없었습니다.
중국의 감방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데 우리가 말을 하거나 누워있으면 공안들
이 와서 참대몽둥이와 전기 곤봉으로 탈북자들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한 주가 지난 후 중국 공안에서는 우리 탈북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워 팔목에 수갑을
채운 후 버스에 실었습니다.
약 2시간 정도 달렸을까? 두만강이 보이고 북한 땅이 보였습니다.
북한 땅이 보이는 순간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를 실은 차는 중국의 길림성 화룡시 덕화진 남평 세관에 멈춘 후 북한측에 전화
연결을 하여 북한의 무산5군 칠성리 세관으로 넘어갔습니다.
북한 보위부에서는 우리를 넘겨받은 후 다시 수갑을 채운 후 물건 짝 다루듯 하며 차
에 실어 무산군 보위부로 옮겼습니다. 무산군 보위부에서 하루 종일 취조를 받은 후
탈북자 8명은 한 줄로 서서 무산군 시내를 약 50분간 돌았습니다.
조국 배반자들을 똑똑히 보라. 조국을 배반하면 이 꼴을 면치 못할 뿐 아니라 어떻게
든 다 잡아 온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무산군 안전부 구류장에 감금되었습니다.
4일 후 나는 나의 거주지인 청진 보위부로 호송되었습니다.
청진 보위부로 옮긴 첫날부터 나는 발목과 손목에 수갑을 채운 채로 20여일 간을 심
문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밥 먹을 때와 변소 갈 때도 풀어주지 않았으며 잠잘 때도 풀어주지 않았습니
다.
그러다가 20일 만에 청진시 송평구역 안전부 구류장으로 옮겨왔습니다.
여기 구류장에서는 수인(죄수)들을 17시간 동안 올방자를 틀고 손은 무릎에 올려놓
은 상태에서 정면을 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래도 보위부에서 취조 받기보다는 더
나았습니다.

나는 송평 구류장에서 약 한 달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다시 옮긴 곳이 바로 함경북도
안전부 산하 최고 예심기관인 농포집결소에 입소되게 되었으며 나의 고달픈 생활의
연장이 시작되었습니다.
강제노동은 하루 13-14시간을 해야 했으며 그 날 과제를 수행 못하면 끝날 때까지 강
제 노동을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노동은 주로 카바이트 재와 진흙을 물에 개어서 블록을 찍어내는데 모든 것을 사람의
손으로 하며 하루 과제는 10여명이 2만장을 찍어내는 것입니다.
2만장의 블록을 찍어내자면 작업시간 내 뛰어다녀도 모자라며 소변도 볼 수 없을 정
도였습니다.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밤에 잠을 잠자는 문제였습니다. 위생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감방에서 세탁과 목욕은 꿈도 꾸지 못하며 기상해서 길어 들인 물로 얼굴이나 겨우 씻
으면 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에 이가 끼고 빈대와 벼룩이 너무도 많아서 그것들과 싸움에 잠을 설치
고 나면 이튿날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낮에는 노동에 시달리고 밤에는 담당 안전원들에게 심문 받고 난 뒤 감방안의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벌거벗고 뼈만 남은 몸으로 이와 벼룩 잡이 하는 모습
은 영화에서 본 2차대전 당시 <오슈벤찐=아우슈비치> 수용소의 바로 그 모습이었습
니다.
이러한 속에서 두 주 정도만 지나면 머리카락에 서캐가 포도송이처럼 다닥다닥 달라
붙습니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더한 것 같았습니다.

또한 알지 못할 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사람도 두 달 동안 여섯 명이나 되었습니다.
밤에 옆에서 함께 잠을 자던 친구가 아침에는 숨을 거두고 말 때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침에 기상하여 점호를 하는 중에 경성군에서 온 친구가 점호에 빠졌다고 당
장 찾아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 친구는 온데간데없
었습니다.
비상소집을 하고 다시 찾으니 화장실에서 바지도 입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우리 몇 사람은 그를 들추어 업고 나와서 집결소 마당에 내려놓았습니다. 아직은 숨
이 넘어가기 전이었으나 맨 땅바닥에 눕혀놓은 체 거들떠보지도 않고 옆에 사람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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